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는 2022년 4월 9일부터 2022년 5월 29일까지 JTBC에서 방영되었던 토일 드라마입니다. 단조롭고 지겨운 일상을 견디며 꾸역꾸역 살고 있는 삼 남매의 해방을 위한 몸부림이 잔잔한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각본은 <또 오해영>, <나의 아저씨>를 집필한 박해영 작가가 맡았으며 연출은 <눈이 부시게>, <올드미스 다이어리> 등을 연출한 김석훈 PD입니다. 극 중 주요 인물들과 박해영 작가의 인터뷰, 그리고 극 중 인물인 염미정의 주옥같은 대사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극 중 주요 인물
염미정 (김지원) : 카드회사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으며 해방클럽의 멤버이고 삼 남매의 막내입니다. 겉으론 수더분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도 잘 들어주는 듯 하지만 실제론 항상 겉도는 느낌이 납니다. 조직에선 살아남기 위한 나름의 방법으로 튀지 않고 살아가려 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늘 생각이 많고 삶이 버겁습니다. 회사에서 직원을 위한답시고 만들어진 어떠한 모임에도 가입하지 않고 혼자 있길 원하지만 비슷한 생각을 가진 직원들과 '해방클럽'이라는 모임을 만들게 됩니다. 서울에서 지하철로 2시간 이상 떨어진 곳에서 출퇴근을 하는 고단한 삶이지만 벗어날 생각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어느 날부터인가 자신의 아버지 밑에서 일을 하는 '구 씨'라는 남자와의 특별한 만남이 시작됩니다.
구 씨 (손석구) : 어디서 굴러들어 온지 모르게 어느 날 미정의 아버지 공장에 들어와 일을 하고 있는 한 남자. 그는 일 외에 다른 시간은 온통 술을 먹는 것에만 쓰는 듯합니다. 그전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며 그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어떤 인간으로, 어떤 위치에 놓아야 될지, 얼마나 피곤하게 계산해 가며 살았었는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힐링 같기도 고문 같기도 하던 삶을 지탱하던 중 미정이가 보입니다. 둘은 서로를 추앙하며 꾸역꾸역 삶을 향해 걸음을 내딛습니다. 사람이 너무 싫고 자신도 싫었던 구 씨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미정에게 마음을 열게 됩니다.
염기정 (이엘 ) : 삼 남매의 맏이이나 막내 미정과는 완전 다른 성격인 듯합니다. 철부지 느낌에 노처녀 히스테리까지 겹친 인물이지만 이혼남인 태훈에게 마음이 끌립니다.
염창희 (이민기) : 편의점 영업관리 업무를 하며 지독하고 불만족스러운 삶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지만, 여러 번 맞닥뜨린 임종의 순간들을 체험하며 그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해방으로 향하는 길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인물입니다. 처음엔 철없어 보이긴 했지만,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가장 극적인 전개로 어른이 되어가는 인물인 듯합니다.
박해영 작가의 인터뷰
박해영 작가는 <나의 해방일지>로 2023년 백상예술대상 극본상을 수상했습니다. <나의 해방일지>는 견딜 수 없이 촌스런 삼 남매의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운 행복 소생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한계에 도달한 인생, 대책 없는 극약 처방으로라도 '지금'을 벗어나려는 이들의 해방기가 따스한 웃음과 공감을 선사했습니다. 박해영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대사의 골조는 빤하고 하고자 하는 말의 핵도 빤하다. 자기감정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사람이 한 페이지 분량으로 중언부언할 얘기도 사실한 줄로 딱 끝내버릴 수 있다. 웬만하면 인물들이 그런 대사를 하게 하자는 주의다. 그래야 보는 사람이 쾌감이 있고 보면서 딴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염미정과 구 씨 역시 딱 골조만 이야기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고 반면 말맛이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런 인물들은 수다를 떨게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평범함' 속에 있는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 일부로 인물을 창조해 낸다고 하면서 인물의 대사를 쓰려면 작두를 타듯 그 인물에 빙의를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이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또 자신의 마음속 조각을 꺼내 그 안에 다른 속성 한 두 개를 주입해 새로운 인물을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염미정의 명대사
당신과 함께 여기 앉아서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이런 그지 같은 일도 아름다운 일이 돼요. 견딜만한 일이 돼요. 연기하는 거예요. 사랑받는 여자인 척, 부족한 게 하나도 없는 여자인 척, 난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의 지지를 받고 그래서 편안한 상태라고 상상하고 싶어요. '난 벌써 당신과 행복한 그 시간을 살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당신 없이 있던 시간에 지치고 힘들었던 것보단 당신을 생각하면서 힘을 냈다는 게 더 기특하지 않나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고 긴긴 시간 이렇게 보내다간 말라죽을 거 같아서 당신을 생각해 낸 거예요. 언젠가는 만나게 될 당신. 적어도 당신한테 난 그렇게 평범하지만은 않겠죠? 누군지도 모르는 당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만나지지도 않는 당신. 당신. 누구일까요?
초등학교 1학년 때 20점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시험지에 부모님 사인을 받아가야 했는데 꺼내진 못하고 시험지가 든 가방만 보면 마음이 돌덩이처럼 무거웠어요. 사인은 받아야 하는데 보여주면 안 되는, 해결은 해야 되는데 엄두가 나지 않는. 지금 상황에서 왜 그게 생각날까요? 뭐가 들키지 말아야 하는 20점짜리 시험지인지 모르겠어요. 남자한테 돈 꿔준 바보 같은 나인지, 여자한테 돈 꾸고 갚지 못한 그 놈인지, 그놈이 전여자 친구에게 갔다는 사실인지. 도대체 뭐가 숨겨야 되는 20점짜리 시험지인지 모르겠어요. 그냥 내가 20점짜리인 건지. 지쳤어요.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진 모르겠는데 그냥 지쳤어요. 모든 관계가 노동이에요. 눈 뜨고 있는 모든 시간이 노동이에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고.
어려서 교회 다닐 때 기도 제목 적어 내는 게 있었는데 애들이 쓴 거 보고 '이런 걸 왜 기도하지? 성적, 원하는 학교, 교우관계... 고작 이런 걸 기도한다고? 신한테? 신인데? 난 궁금한 건 하나밖에 없었어. 난 뭐예요? 나 여기 왜 있어요? 50년 전엔 존재하지 않았고 50년 후면 존재하지 않을 건데 이전에도 존재했고 이후에도 존재할 것 같은 느낌. 내가 영원할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에 시달리면서도 마음이 어느 한 군데도, 한 번도 안착한 적이 없어. 이불속에서도 불안하고 사람들 속에서도 불안하고 난 왜 딴 애들처럼 해맑게 웃지 못할까? 난 왜 늘 슬플까? 왜 늘 가슴이 뛸까? 왜 다 재미없을까? 인간은 다 허수아비 같아. 자기가 진짜 뭔지 모르면서 그냥 연기하며 사는 허수아비. 어떻게 보면 건강하게 잘 산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모든 질문을 잠재워 두기로 합의한 사람일 수도. '인생은 이런 거야.'라고 어떤 거짓말에 합의한 사람들. 난 합의 안 해. 죽어서 가는 천국 따윈 필요 없어. 살아서 천국을 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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